2023. 4. 18. 00:06ㆍ영어교육
언어학자 제임스 폴 지(James Paul Gee)의 용어를 빌면,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맥락에서만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담화(Discourse)라고 한다. 그들만의 특정한 담화에 끼려면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하고, 언어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나 행동 양식으로 그들만의 특성을 내보이기도 한다. 한국어나 영어나 다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나 술어가 있다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맥락이 비슷하여 공통된 담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만의 단어나 술어들을 그들의 담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담화를 익혀야 진정으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영어도 단어가 아니라, 담화와 맥락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
1. VOCA 22000은 필수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에서 열리는 특강들 중에서 단연 VOCA 22000이 눈에 띄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고등학교 때 보던 단어장은 집어 던지고, VOCA 22000 정도는 옆구리에 끼고 다녀야 어딜 가서라도 대학생 취급을 받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책 내용은 잘 살펴 보지도 않고 싼 수강료에 놀라서 강의를 끊고 교재를 넘겨 받았다. 학원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이라니. 더욱이, 그 책 제목은 등산가들이 에베레스트를 꿈꾸는 것처럼, 여전히 단어 암기의 정점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쓰인다. “VOCA 22000”
사실, 지금은 다들 눈치챘겠지만 출판사와 학교에서 이런 특강을 기획하는 진짜 이유는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높여주겠다는 선의 보다, 출판사는 우선 책을 많이 팔아야 하고 학교는 노는 강의실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계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출판사 입장에서는 수강료도 있기는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돈은 대부분 강사료나 강의실 대여료를 지급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수준이다. 수강생이 충분하지 않으면 오히려 모자랄 수도 있다. 그래서 싸다. 다른 대학교 특강도 대부분 그런 식이다.
2. 단어 강의의 효과
강의 내용이나 진행 방식은 VOCA 22000뿐만 아니라 WORD SMART나 다른 단어 중심의 강의도 대부분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책에 등장하는 단어를 중심으로 비슷한 말과 반대말 혹은 연관어들까지 무지막지하게 많은 단어들을 칠판에 쏟아 붓는다. 그래서 강사의 단어 실력을 자랑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 영어에 대한 경외감 내지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식으로 수업은 진행된다. 모든 지식 전달 수업이 그렇듯이 강사는 이미 그 단어들을 알고 있지만, 과연 학생들이 그 단어를 외울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도 그 단어들을 외우기 위해 필요한 기술 혹은 꼼수를 몇 가지 알려줄 수 있다면, 그나마 능력 있는 강사다. 가격이 싼 만큼 강사의 실력도 들쭉날쭉 하다는 것이 학교 특강이 지닌 또 하나의 맹점이다. 물론, 뛰어난 강사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능력이 있으면 돈을 더 주는 학원으로 가는 것이 상식이다. 출판사에서도 대학 시간 강사보다 적은 돈을 주고 새벽부터 강의해줄 사람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3. VOCA 22000의 진실
학생들은 대부분 22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경외감에 책을 사고 강의를 끊었지만, 수업 첫 시간에 교재를 처음 펼치면서 당황하게 된다. 눈대중으로 어림잡아도 책에 수록된 단어는 책 제목에 붙어있는 숫자만큼 되지 않는다. 완전 사기다. 나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책에 있는 단어들은 책 제목의 숫자만큼의 어휘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혹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후회해도 늦었다. 그래도 왕년에 단어 꽤나 외워 본 개인적인 경험으로 판단해 볼 때, 그 책에서 취하고 있는 두 가지 방법, 즉 어원이나 주제어 중심으로 관련 어휘를 암기하는 것은 단어를 외우는데 효과적이다.
아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이 다다. 그 어렵고 많은 단어들을 암기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단어들이 내가 주로 읽는 영어책이나 많이 보는 영상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중에 영어 공부를 하는데 혹은 말을 하는 데는 더더욱 VOCA 22000 속의 단어들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별 쓸데 없는 단어만 골라서 죽자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한 번 잘 해 보겠다고 따로 단어까지 외웠는데, 한 번 보기도 힘들다면 어떡하냐고 원망해도 소용없다.
결론적으로
맥락을 떠난 단어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의미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파악하는 거이 우선이다. 그래야 영어를,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영화를 보다 영어 단어 한 두 개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두 단어로 영화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VOCA 22000을 달달 외워서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안다고, 혹은 그 단어를 아무리 글로만 알고 있어 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영어를 사용하지 못 하고 오로지 배우기만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 대한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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