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2. 15:34ㆍ영어교육
단어를 빨리 찾아 단어의 뜻에 대한 궁금증만 해결하면, 그 단어에 대한 기억도 빨리 휘발되어 버린다. 여러 번 오래 본 단어가 더 오래 기억되는 법이다. 인간의 기억력이 그렇게 작동한다. 단어도 쉽게 찾은 것은 쉽게 잊게 된다. 그러므로 특히나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와 문장을 찾고 그 과정에서 많은 다른 단어들을 읽어가며 익히기에는 스마트폰보다는 종이 사전이 낫다.
핸드폰이 전화기를 넘어 다이어리, MP3 플레이어, TV 등을 집어삼키면서 스마트 폰이라고 불리게 된 지 오래다. 사전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네이버 탭의 하나로 아니면 작은 어플 하나로 줄어들어 버렸다. 그래서 손바닥 보다 작은 기기 안에 여러 권의 사전을 함께 넣고 다니게 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사전을 사용하는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종이 사전이 주는 과거의 낭만을 넘어, 진지한 노력과 느린 공부법이기도 하다.
“아빠, ‘계승’이 무슨 뜻이에요?” 국어 문제집을 풀던 아이가 아빠 방에 와서 묻는다. 국어 문제집에 나오는 지문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라고 했더니, 혼자 생각해 보다가 물으러 온 모양이다.
“계승? 어느 문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우선,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을 먼저 살펴 봐야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어느 단어와 함께 쓰였는지에 따라 단어의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거든.”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방에서 문제집을 들고 오더니, 단어가 들어간 전체 문장을 읽어준다. “과거 화랑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 그 문장에서 ‘계승’은 이을 계(繼) 이을 승(承)이라는 한자로 만들어진 단어야, 무언가를 잇는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전해 내려오는 화랑정신을 오늘까지 잇는다는 뜻이겠지?.”
“아하, 그렇구나.”
“아빠 말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너도 방에 가서 한 번 사전을 찾아 봐.”
“맞다. 나도 사전이 있었지.”
얼마 전에 내 방에 들어와서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자기 눈높이에 있는 책꽂이에 놓인 국어사전을 펼쳐보며 관심을 보이길래, 아예 사전을 아이 방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은 나도 잘 쓰지 않는 국어사전이라서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될 듯싶었다.
“아빠도 모르거나 헷갈리는 단어가 있으면 찾아보거든. 네 방에다 가져다 둘 테니까, 너도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때마다 찾아봐.”
아빠의 말에 금방 네,라는 답이 돌아왔지만, 계기가 없으면 혼자서는 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 생각이 난 김에, 혼자서 사전을 찾아보는 연습을 시킨 것이다.
“아빠, 아빠 말이 맞는데요.” 방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계승, 1. 조상의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2. 선임자의 뒤를 이어받음. 여러 외척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사전의 내용을 정의부터 예문까지 그대로 다 소리 내어 읽는다. 자기가 찾은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 잘 했습니다~”
아동용 국어사전이 아니라, 아이의 손바닥 정도 높이의 사전을 가져다준 탓에 “계승”이라는 단어 하나를 찾는 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ㄱ’부터 ‘ㅓ’와 ‘ㅕ’를 지나 다시 ‘ㅅ’으로 이어지는 단어를 찾아가면서 ‘계승’이라는 단어를 수 십 번 반복해서 말해 봤을 것이다. 아빠가 입으로 손쉽게 알려준 뜻은 한 번에 아이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러 번 아이가 스스로 반복하고 나서야 그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마침내 그 단어를 찾아내어 처음 나오는 뜻과, 두 번째 나오는 뜻을 아빠 들으라고 큰 소리로 읽는다. 예문까지 읽어준다. 일단, 그것으로 됐다. 단어 뜻을 한 번에 암기하지 못해도, 그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 아이의 머릿속에서 “계승”이라는 단어는 최소한 여러 번 반복되었을 것이다.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더라도 내가 찾아봤던 단어라는 기억만 있으면 족하다. 일단은 그것이 이 사전 놀이의 목표다.
종이 사전이 전자 사전으로 대체되고 다시 핸드폰 안으로 들어오면서, 단어의 뜻을 찾는 일은 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단어의 설명에 등장하는 다른 단어도 터치 하나면 바로 연결되기도 한다. 영어 단어 같은 경우에는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으로 구별해서 들려주기도 한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나 모르는 단어를 찾아내는 시간이 빨라졌다고 해서, 그 단어를 외울 수 있는 시간까지 빨라진 것은 아니다.
더 빨리 단어를 찾을 수 있는 만큼, 단어의 뜻에 대한 궁금증만 해결해주고 나면, 그 기억은 더 빨리 휘발되어 버린다. 여러 번 오래 보지 않은 단어는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다. 결국, 아이도 나중에는 인터넷으로 혹은 핸드폰으로 단어를 찾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렇듯이. 그러나 일단,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와 문장을 찾고 그 과정에서 많은 다른 단어들을 읽어가며 익히기에는 디지털보다는 종이가 훨씬 낫다. 영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오랜 노력이 더해지려면 종이 사전이 더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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