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A 22000에는 22000 단어가 없다

2023. 4. 11. 00:05영어교육

728x90
반응형
728x90

 

영어에서 단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차피 언어의 가장 기본 단위가 단어라고 가정한다면 단어를 많이 알고 있을수록 그 언어를 잘 알고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많은 단어를 외우는 것이 좋다고 선생님과 선배들은 강조했는지 모른다. 그 말을 듣고 영어 좀 한다는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단어장을 끼고 살았고, 나도 그런 재수없는 부류 중의 하나였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장 탐독한 책은 다름 아닌 VOCA 9000으로 단어가 총 9000개나 되는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정말 많은 단어가 주제어, 관련 어휘, 파생어를 중심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곳에 나름 외워야 하는 단어들을 추가적으로 적어 넣고 발전시키며 나만의 VOCA를 만들어 언제 어디나 들고 다녔던 것 같다. 영어에 대한 내 불안을 잠재우려 그 VOCA를 부적처럼 들고 다녔지만, 그렇게 단어만 따로 외우는 것은 언어를 배우려는 목적과 결코 맞지 않는다.


 

​1.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 하나가 아닌 전체 맥락이다.

단어는 앞의 단어와 뒤의 단어와 연결되어야 온전한 뜻을 알 수 있다. 앞 뒤에 오는 단어에 따라서 그 단어의 뜻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앞, 뒤 문장까지 이해하고 나면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린이 그림책에 나오는 명사들만 생각한다면 별 문제도 없어 보이고 의미도 명백할 수 있다. 그러나 형용사나 동사로 넘어가면 아무리 사전을 읽어도 (그 역시 영어 사전에 대한 번역인지라) 좀처럼 이해가 안 되고 생전 처음 보는 한자어 조합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많이 읽고 보아온 talk, speak, tell, say, mention라는 단어는 모두 사전에 “말하다”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숨은 의미나 형식은 모두 이 단어들 너머를 살펴봐야 알 수 있다. 또 오랫동안 단어만 외우다가 문장의 수준으로 넘어갔을 때, 단어의 뜻은 다 알겠는데 문장의 뜻은 알 수 없었던 이상한 경험을 해 본적이 있는가? 단어만 가지고는, 심지어 거기에 문법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말은 숫자와 기호로 완전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수학이 아니다.

2. 단어를 짧은 시간 내에 암기하고 다시 몇 일 내로 잊어버리는 방식은 지식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머릿속으로 그 뜻과 스펠링을 알고 있는 단어들은 절대 당신의 입 밖으로 혹은 글로 나오지 않는다.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은 ETS가 관장하는 GRE라는 시험인데, 그 시험에 나오는 단어의 수준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 시험을 대비해서 내가 외워야 했던 단어의 90% 정도는 내가 그때까지 영어를 공부하면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단어였다. 물론, 한국인 특유의 벼락치기와 후기 문화 덕분에 난 GRE에서 꽤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성공적으로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끝이다.

시험장을 벗어난 뒤에는 GRE를 공부하면서 암기했던 단어들을 거의 만난 적이 없고, 당연히 나도 그 단어들을 아주 빠르게 잊어버렸다. 굳이 시험을 위해 많은 단어를 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준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전공 수업에서 토론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쓰거나 읽을 때를 제외하면, 내가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한 단어나 문장 수준은 결코 그 수준을 넘지 않는다. 머리로 암기한 단어는 언어가 아니라 지식이다.

3. 단어의 수는 끝이 없다.

처음에는 수능 필수 어휘를 외우고, 대학에 가면 토익 실전 어휘를 외우고, 유학을 가려면 토플 빈출 단어를 외우고, 영어권 국가에서 석사나 박사를 하려면 GRE나 GMAT 단어를 외운다.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학문이 깊어지고 전문 분야를 갖게 되면 jargon이라고 해서 그 분야만의 단어들을 또 외워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는 한 단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운 literacy도 내가 연구하던 분야에서는 Mulitliteracy 혹은 Multilitarcies 라는 용어로 발전시켜 사용한다. 여전히 이 단어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없다. 웬만한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단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가변적인 영어 단어의 수에 비해 실제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불과 몇 천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단어를 안다고 자랑하거나, 시험을 대비해 단어를 외워야 할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인 단어들이 실제 문장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좀더 주의 깊게 살피고, 스스로 어떻게 사용할지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어 단어를 외웠던 것처럼 단어들의 뜻만 알고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그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충분히 보고, 듣고, 읽고, 말해보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공부가 아니라 습관의 영역이다.

 

© raphaelphotoch, 출처 Unsplash

 

단어를 모르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겠지만 단어만 안다고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그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정작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어떻게’에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단어를 많이 외우면 좋다고 해서 “VOCA 22000”라는 책이 유행했었다. 대학에 가면 당최 알 수 없는 저 단어들을 22000개나 외워야 하나 걱정하기도 했다.

어원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그 책의 방법론은 이후에도 여러 책과 강좌에 도입되었으나 효과는 그 책만큼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여전히 문장 속의 의미와는 별개로 단어만 외우는 학생들을 통해 금새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구슬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구슬로 얼마나 멋진 목걸이를 만들 수 있는가이다.

2023.04.08 - [영어교육] - 영어 사전을 영어 공부에 잘 활용하는 방법

728x90
반응형